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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KS 5차전 후기 - V12

KIA Tigers 경기 리뷰

by Lenore 2024. 10. 2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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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를 앞두고

 

저는 야구를 냉정히 보려는 사람입니다. 야구장에 가는 것보다 TV를 보며 분석하면서 보는 걸 좋아합니다. 야구장에 가더라도 응원석은 제가 기피하는 제1의 자리입니다. 저는 야구를 보고 싶은 거지, 응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잠실 야구장을 가면 포수 뒷자리를 선호합니다. 잠실 야구장의 광활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타구의 궤적이 참 멋지거든요. 타구가 맞는 순간의 수비수들의 움직임도 볼 수 있고요.

 

하지만 야구를 '냉정히 본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미친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폭투로 동점이 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잘 자고 있던 고양이 두 마리를 놀라게 했고, 8회에 박찬호의 쐐기 타점이 나왔을 때 또 환호성을 지르다가 물을 마시고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사레 들릴 뻔 했습니다.

 

야구란 '운'이 크게 작용하는 스포츠라는 생각에서, 정규시즌이 끝나고 한국시리즈가 시작할 때까지 길에 쓰레기가 떨어지면 항상 주었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했으며, 부정 탈 것 같아서 집안일을 중도에 멈추지 않고 항상 끝까지 했습니다. 5차전이 열리기 전날, 음식물 쓰레기와 집에 있는 재활용 쓰레기들을 모두 처분했습니다. 꼼꼼하게 분리수거를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내가 보면 진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선수들은 내가 야구를 보는 지 안 보는 지도 모르는데요. 하지만, 저 역시 샤머니즘에 빠져서 TV 볼륨을 항상 '14'에 고정했습니다. 볼륨을 바꾸면, 마치 안 좋은 상황이 연출될까봐요.

 

한국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그냥 기절 세게 한 번 하고, 한국시리즈 끝날 때 눈 떴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 한국시리즈 5경기(7경기 했으면 진지하게 심장 움켜쥐고 구급차 탔을 듯)를 라이브로 보는 건 큰 시련(?)이었습니다. 심지어 전 야구 경기 하는 동안 밥도 안 먹었습니다. 지금도 저녁 안 먹고 글을 적고 있습니다.

 

전 냉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공 하나에 감정 기복을 느끼고, 부정탈까봐 조마조마하고, 응원팀이 꼭 이겼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온갖 바보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게 음식물 쓰레기 버리다가 실수로 음식물 쓰레기를 담고 있던 비닐 봉지를 버린 다음 날(찝찝했지만, 음식물 쓰레기 통을 뒤져서 봉지를 꺼낼 수 없으니까) 그 대단한 6.25 대첩이 있었죠. 14:1 경기가 동점이 되는 순간, 아 내가 어제 음식물 쓰레기를 대충 버려서 그렇구나 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9년 한국시리즈, 2017년 한국시리즈처럼 양팀 전력이 팽팽한 상황이 아니라서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솔직히 KIA 팬이 아닌 제3자가 이번 한국시리즈 매치업을 보면 '야, KIA가 못 이기면 등신이지' 라는 생각했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삼성에서는 핵심 선발투수 코너가 빠졌고, 핵심 타자 구자욱이 빠졌고, 핵심 불펜투수 최지광이 빠졌습니다. 심지어 시리즈 막판에는 원태인도 빠지고 강민호도 빠졌습니다. 이들이 다 있을 때도 무려 9경기 차이 1위였고, 양팀 상대 전적이 12승 4패였습니다.

 

이런 상황이라서 더욱 스트레스 받았습니다. 2009년,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어느 팀이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전력이었지만, 2024년 한국시리즈는 KIA가 지면 역대급으로 역사에 남는 기적 같은 시리즈가 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오늘 삼성이 이겼더라도 KIA가 시리즈에서 지는 그림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삼성은 마운드에 믿을만한 투수가 '레예스' 단 한 명이었고, 5:1로 오늘 경기 지고 있는 순간에서도 삼성 불펜투수들은 KIA 타선을 전혀 압도하지 못 하고 있었고, 승리계투조 임창민은 6회에, 마무리 투수 김재윤은 7회에 나왔습니다. 이러고도 삼성이 우승했으면 기적이죠. 

 

그 기적의 희생양이 될까봐 오히려 2009년 한국시리즈, 2017년 한국시리즈보다 더 스트레스 받으면서 야구를 봤던 것 같습니다. '역대급 창피는 당하지 말자'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 탓이겠죠. 하지만, 이런 일개 팬의 마음과 상관없이 이범호 감독 이하, 선수들은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기적'은 없었고, '순리'만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잡썰 줄이고, 오늘 경기 리뷰 들어갑니다.

 

 

삼성은 삼성의 야구를 했고, KIA는 KIA의 야구를 했다.

 

1회에 양현종이 디아즈와 김영웅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며 3실점을 한꺼번에 할 때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3점 정도는 KIA 타선이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삼성 선발 (좌완)이승현을 상대로 1회말에 바로 따라 가는 점수를 뽑아줬어요. 게다가 타자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고 정말 삼성 투수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더군요.

 

하지만 3회에 또 다시 디아즈에게 2점 홈런을 허용했을 때는, 어라? 이러다가 말리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일 휴식 후 등판이라고 하지만, 6차전에서 레예스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긁히면 3차전의 패배가 또 반복되지 말란 법은 없죠. 여기에 6차전 선발이 윤영철이면 삼성 타자들의 홈런 한 방이 무섭고, 라우어의 구위는 믿음직하지만 역시 3일 휴식 후 등판이라면 변수가 너무 많죠. 물론, 그럼에도 KIA가 훨씬 유리한 입장이긴 합니다. 

 

오늘 양현종은 그냥 세월 무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아요. 2차전과 달리 오늘은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위주로 피칭을 했는데 슬라이더가 밋밋하게 들어가면서 배팅볼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1회에 백투백을 허용한 슬라이더는 농담 아니라 홈런 더비에서 던졌어야 할 공들이었어요. 슬라이더를 던질 거였으면 이준영이 디아즈를 삼진 잡은 그 코스로 던졌어야죠. 3회에는 가위바위보 싸움이 잘못됐죠. 초구 슬라이더로 카운트 잡고, 포심을 우겨 넣었는데 넣을 거면 바깥쪽 높은 코스로 던졌어야 했는데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맙니다. 지금 양현종의 구위로는 디아즈를 이겨낼 수 없죠.

 

이제 믿을 건 KIA 타선과 불펜 밖에 없었는데, KIA 불펜투수들이 모두 다 잘해줬고(시구한 전상현만 빼고) KIA 타자들은 비록 적시타는 잘 안 나오면서 무수한 잔루를 남겼지만, 삼성 불펜투수들을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삼성 타선과 KIA 타선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는데, 삼성 타선은 한 방 한 방이 무섭지만, 집중타가 안 나왔고, KIA 타선은 삼성 만큼 홈런 생산능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정확한 타격과 컨택으로 삼성 투수진을 정말 엄청나게 괴롭혔습니다. 단지 결정타만 못 날리고 있던 상황이었고요.

 

그리고 양팀 불펜 자원 차이가 크기도 했죠. 심지어 삼성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나왔지만 KIA 불펜투수들은 한국시리즈 임박 전에 휴식을 충분히 취했습니다. 게다가 LG처럼 특정 선수(에르난데스)에게 기대는 불펜진도 아니고, 곽도규, 전상현, 장현식, 정해영, 이준영 등 승리계투조가 무려 5명이었죠. 여기에 4-5선발에서 중간 롱릴리프로 활용한 황동하와 김도현까지 모두 제몫을 다해줬습니다. 

 

기록이 이걸 잘 말해줍니다. 5번의 시리즈에서 KIA 불펜진은 3점 밖에 주지 않았고, KIA 투수진은 삼성 타선을 상대로 홈런을 맞을 지언정 연속 안타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적시타로 내 준 실점은 정해영이 2차전에 내준 1점과 4차전에 큰 점수 차이에서 네일이 내준 1점 등 단 2실점에 그쳤습니다. 시리즈 전체 전적도 4승 1패로 차이가 컸지만, 경기 내용만 따지고 보더라도 레예스에게 막힌 3차전을 제외하면 KIA가 내내 삼성을 '압도'했어요.

 

오늘 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코어는 7대5로 팽팽했지만, 삼성 타선은 오늘 5안타 밖에 치지 못 했고(이 중 홈런이 3방인 게 문제였죠), KIA 타선은 무려 13안타를 만들어냈습니다. 심지어 타석에서 끈질긴 수싸움으로 10개의 사사구까지 얻어냈고요. 23명의 주자가 나갔는데 7득점 밖에 못 한거죠. 이렇게 많은 잔루에도 이길 수 있었던 건, 불펜이 잘 지켜주고, 타자들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끈질겼기 때문입니다.

 

한국시리즈 같은 큰 경기에서는 마운드의 높이야 말로 '변수'를 억제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번 한국시리즈에서 KIA 마운드는 '양현종'을 제외한 모든 투수들(전상현도 1차전은 잘 막아줬죠.)이 정말 자기 역할을 다 잘 해줬어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피칭을 한 이유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고요. 144경기의 여정이 정말 빛을 발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전상현, 곽도규, 정해영, 김도현 등 구위 좋은 투수들을 많이 육성해낸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장현식은 트레이드 영입)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

 

저에게 야구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 온 저의 저녁을 충만하게 해 준 존재였습니다. 집에서 조용히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소파에 몸을 파묻고 야구를 보고, 야구가 끝나면 경기를 복기하면서 흔적을 남기는 행위는 저의 일상이자, 외부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주는 매개체였습니다. 비록 모니터나 스마트폰 밖이라지만,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사회적 동물인 저에게는 큰 위안이 되어줬습니다.

 

올해 목표가 KIA의 144경기를 전부 1회부터 9회까지 보고, 복기하고, 후기를 남기는 것이었는데, 이를 이룰 수 있어서 너무 뿌듯합니다. 그리고 개막전부터 적었던 'KIA Tigers'의 2024 후기가 'V12'로 마무리 되어서 더욱 충만함을 느낍니다.

 

그동안 제 난잡한 글들을 꼼꼼하게 챙겨 봐주시고 추천도 날려주시고, 댓글도 날려주신 여러분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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