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요인
일요일 경기 하고 월~수까지 푹 쉬고 오랜만에 경기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선발 라우어부터 장현식, 곽도규, 김기훈 모두 힘이 있는 투구를 하면서 롯데 타선을 단 2안타로 막았고(심지어 두 개 다 잘 맞은 타구가 아니었음), 삼진은 13개나 잡았습니다. 볼넷도 1개 허용 밖에 없었고요. 투수들이 그야말로 완벽한 투구를 했는데 타선도 15개의 안타와 5개의 사사구를 묶어 10득점을 뽑아내며 편안한 승리를 거뒀네요.
모든 것이 좋아 진 라우어
오늘 경기 승리의 1등 공신은 에릭 라우어입니다. '이게 바로 메이저리거다'라는 걸 잘 보여준 투구였습니다. 지난 한화 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지난 한화 전보다 더 좋은 투구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롯데 타선 타격감이 안 좋았던 것도 아니고 바로 전날 경기에서 김광현을 상대로 6득점, 총 10득점을 뽑아낸 타선이었죠.
라우어가 좋아진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경기 후기에도 적었는데, 볼배합을 자신이 직접 하면서 멘탈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 것 같고, 가장 크게 좋아진 부분은 역시 변화구의 완성도입니다. 한화전 이전까지는 우타자를 잡아내는 결정구가 없어서 투구 수도 늘어나고 안타도 많이 맞았는데, 한화전 이후부터 슬라이더와 커터가 아주 좋은 위치에서 떨어집니다.
오늘 경기도 일찍 끝나서 움짤 몇 개 제작해보겠습니다.
4회 선두타자 윤동희를 상대로 몸쪽 커터를 정확히 집어 넣어서 루킹 삼진으로 잡아내는 장면입니다. 포수가 앉은 위치에 정확히 넣은 제구력도 놀랍지만, 우타자 상대로 던졌던 커터가 그동안 커트가 많이 됐는데 저렇게 몸쪽 낮게 들어가면 휘둘러서 컨택해봐야 3-유간 땅볼입니다. 주자가 있을 때 저런 식으로 정확히 던지면 병살타를 많이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레이예스를 상대할 때는 몸쪽을 파고 들며 들어가는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았습니다. 참고로, 레이예스는 현재 리그에서 에레디아와 함께 가장 정확한 컨택 능력을 보여주는 선수입니다. 그런 선수를 좌투수가 슬라이더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다는 것에서 라우어의 슬라이더 각도가 상당히 날카롭게 떨어짐을 알 수 있어요.
네이버엔 윤동희와 레이예스를 삼진 잡은 구종이 모두 슬라이더로 찍히는데, 커터와 슬라이더 구분이 어렵기도 하고, 제 생각엔 140km/h 초반이나 130km/h 후반이면 커터, 135km/h 내외면 슬라이더로 보는 게 맞지 않나 싶네요.
개인적으로 가장 탄성이 나왔던 삼진은 전준우를 삼진 잡을 때입니다. 초구에 120km/h 커브로 카운트 잡고 두 번째 공은 하이존 경계에 포심 던져서 파울. 그리고 세 번째에 다시 커브를 던져서 헛스윙 삼진을 잡아냅니다. 2구째 포심에 전준우가 타이밍을 맞추니까 히팅 포인트가 앞에 있는 전준우를 상대로 커브를 던져서 헛스윙을 유도했죠.
3구째 커브가 떨어지기 시작한 포인트를 보세요. 포심을 생각하고 있다면, 방망이가 안 나올 수가 없는 포인트입니다. 포심을 하이 존에 던지니까, 타자 눈 높이는 높은 쪽으로 오는 공에 맞춰져 있고, 그 상황에서 커브를 저렇게 떨구면 KBO 타자들 100이면 98명이 방망이를 헛돌릴 겁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피칭 디자인이었어요.
그동안 우타 상대로 바깥쪽 떨어지는 체인지업이 없던 라우어가 커터를 몸쪽 낮게 던져서 범타 유도. 슬라이더를 몸쪽 파고 들게 던져서 헛스윙 유도. 그리고 하이존에 포심 넣고 떨어지는 커브로 헛스윙 유도. 이게 정확히 이루어지기만 하면 결정구로 이만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라우어의 슬라이더, 커터, 커브가 잘 통하는 이유는 '포심'의 위력에 있죠.
움짤은 변화구 삼진만 가져왔는데 오늘 라우어의 삼진은 대부분 포심. 그것도 하이 패스트볼입니다. 첫 타자 윤동희부터 몸쪽 하이 패스트볼(146km/h)으로 헛스윙 삼진. 2회 첫 타자 레이예스 역시 몸쪽 하이 패스트볼(148km/h)으로 헛스윙 삼진. 3회 두 번째 타자 박승욱 바깥쪽 하이 패스트볼(147km/h)으로 루킹 삼진. 6회 강태율 바깥쪽 하이 패스트볼(148km/h)으로 헛스윙 삼진. 마지막 타자 고승민 상대로 몸쪽 낮게 포심(149km/h)으로 루킹 삼진.
오늘 잡아 낸 삼진 9개 중에서 5개가 포심, 나머지 4개가 변화구(커터/슬라이더 3개, 커브 1개)로 잡아낸 삼진입니다. 라우어가 메이저리그에서 2년 연속 풀타임 선발 ERA 3점대 기록한 것도 별 거 없습니다. 하이 패스트볼을 잘 던져서입니다. 메이저리그 타자들도 이겨내지 못한 하이 패스트볼을 KBO 타자들이 쉽게 이겨내기란 어렵죠.
오늘 포심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던진 공의 63%가 포심이었을 정도로 포심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포심 피OPS가 오늘 .258에 불과했습니다. 피안타율이 아니라 피OPS 입니다. 그리고 시즌 전체로 따져도 라우어의 포심 피OPS는 .545에 불과합니다.
부상 때문에 구속이 떨어졌다?(정작, 부상당한 쪽은 글러브 낀 팔임;;) 디셉션 동작이 안 좋다?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구속이 떨어졌다고 해도 좌완이 던지는 포심 평속 146.5km/h이고, 디셉션 동작이 안 좋으면 상대 타자들이 라우어 포심을 쉽게 공략하지요. 실제로 눈으로 봐도 라우어의 디셉션 동작이 안 좋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갑자기 높은 타점으로 하이 패스트볼이 위력적으로 오는 데 치기가 쉽지 않아요.
라우어가 헤맸던 이유는 주무기인 커터와 커브가 밋밋하게 들어갔기 때문인데, 지난 한화 전에서 스타우트가 '발판 위치를 조정해봐 나도 그렇게 해보니까 변화구 각이 살더라?' 라고 했고, 이 조언을 받아 들이면서부터입니다.
실제로 발판 위치 조정한 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 조언이 통했고. 스타우트는 올해 재계약에 실패하더라도(라우어가 포스트시즌까지 잘 던지면 재계약 가능성은 낮죠) 이 조언 하나만으로도 100만불 짜리 조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악성 KIA팬덤에서는 볼배합을 포수가 안 하고 투수가 하며 나아졌으니까 김태군 폐급 볼배합이라고 깎아내리기 여지 없는데, 라우어의 문제는 볼배합이 아니라 변화구 커맨드였어요. 볼배합은 부차적인 문제고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죠.
그리고 라우어는 이제 자기 집 떠난 지 1개월 조금 지났습니다. 아무리 메이저리거였어도 낯선 땅에서 생활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해야죠. 실제로 올 시즌 현재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삼성의 코너 시볼드. KBO 오기 전에 가장 주목 받는 외국인 투수였는데 3월 피OPS .931, 4월 피OPS .797을 기록하며 퇴출 소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적응하니까, 그 이후에 5월부터 9월까지 월별 피OPS .636이 가장 나쁜 기록입니다.
한국 사람도 직장 옮기고 부서 옮기고, 근무지 옮기면 처음에 어리버리대기 마련인데, 라우어 초반에 흔들린다고 '메이저리거인줄 알았는데 한국 투수만도 못 하네'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기 짝이 없죠. 그냥 라우어가 좋아진 건 '적응이 끝났거나', 'KBO 공인구가 드디어 손에 익었거나', '발판 조정으로 변화구 각이 진짜 살아났거나' '직접 볼배합을 하며 멘탈 관리를 했거나' 등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범호 감독의 역할도 여기서 빼 놓을 수 없죠. 국내 지도자들은 흔히 외국인 투수를 데리고 오면, KBO 문화를 모른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 룰에 따라야지! 하면서 윽박지르기 쉬운데, 이범호 감독은 라우어에게 '너가 한 번 볼배합을 해보삼~'이라고 배려해줬습니다. 명감독은 별거 없습니다. 선수가 가진 능력을 100% 이상 끌어내는 게 명감독이죠. 감독이라는 '지위'에 올라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억지로 선수를 감독에 맞추는 것보다는 선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감독의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3일 쉬니까 몸이 엄청 가볍네?
오늘 라우어도 정말 잘 해줬지만, 나머지 투수, 야수들도 정말 좋았죠. 3일 쉬고 경기해서 그런지 몰라도 투수나 타자들이나 몸이 정말 가벼워 보였습니다. 내일도 경기가 없어서 장현식, 곽도규가 모두 등판했는데 둘 다 공이 그야말로 쩔어 줬습니다. 장현식은 포심의 위력을 앞세우며 카운트 유리하게 잡은 뒤에 결정구 슬라이더로 손호영을 삼진으로 잡았고, 곽도규는 오선진에게 불운한 안타를 하나 허용했을 뿐, 나머지 타자들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는 엄청난 피칭을 했죠.
곽도규가 정말 대단한 게, 풀 시즌을 처음 치르는 데, 경기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공에 더 힘이 붙고, 우타자 약점도 점점 지워나가고 있습니다. 투구 폼이 아무래도 우타자는 조금 더 곽도규의 공을 오래 지켜볼 수 밖에 없음에도 포크볼을 활용하면서 상대 타자를 그야말로 압도하고 있죠. 구속도 전광판 기준 150km/h을 상회했고요.
고졸 2년차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이 선수 2차 5라운드였어요. 고3 기록을 보면 39.2이닝 동안 ERA 4.05에 사사구가 27개(탈삼진 47개)였습니다. 공이 빨랐던 것도 아니죠. 공이라도 빨랐으면 지명 순번은 더 높았을 겁니다.
곽도규가 고등학교 때 공을 이렇게 던졌다? 전체 1번 픽에 이름 오르내리고 있었을 테고, 뻥 좀 보태서 메이저리그 입질도 있었을 겁니다. 쉽게 말해서 KIA 스카우트진과 육성 시스템은 이제 고등학교 졸업한 지 2년 밖에 안 된 선수, 지금 기량이면 전체 1번 픽도 받았을 선수를 2차 5라운드에 뽑은 쾌거를 거둔 셈입니다. 여기에 경기를 거듭할수록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 더 대박이죠.
황동하나 곽도규나 최근 KIA 스카우트진과 육성 시스템이 배출한 최고의 아웃풋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 때문에 이번 드래프트에서도 팀에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우완 정통파 투수를 적극적으로 뽑았고요. 상위에서 뽑은 김태형과 이호민은 선발투수로 장기적인 안목으로 키우고, 공이 빠르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나머지 투수들은 30개의 투구를 1군 무대에서 강하게 던질 수 있는 불펜투수로 육성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경기를 보니, 더더욱 한국시리즈 직행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우어도 좋아지고 있고, 네일도 한국시리즈 등판까지 몸을 만들어나가고 있으며, 윤영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네일과 윤영철 한국시리즈 등판만 가능하다면, 푹 쉬고 등판하는 거라 경기 감각만 잘 끌어 올리면 오히려 좋죠.
그리고 KIA의 가장 큰 장점은 투수 물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장현식, 정해영, 전상현, 곽도규는 물론이고 좌타자 저격용으로 이준영, 김대유를 쓸 수 있는데다가 여차하면 롱릴리프로 김기훈, 임기영, 김승현, 김사윤까지 물량 투입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올해 부진하다지만, 최지민까지 작년 모습을 회복하면 불펜의 양과 다양성은 타 팀을 압도하고도 남죠. 그러니 현재 리그 팀 ERA 1위를 달리고 있고요.
남은 경기 하루 빨리 매직 넘버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상 없이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오선진 빗맞은 안타 때 박찬호나 박정우 부상당할까봐 깜짝 놀랐네요. 박찬호가 평상시라면 적극적으로 달려가서 수비했을텐데, 본인도 부상 위험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인지, 평소라면 열심히 뛰어서 잡았을 타구를 신중하게 수비한 것만 봐도 똑똑한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0점 차이인데 무리할 필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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