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스의 엄청난 투구
1회 엔스의 공을 보면서 오늘 경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아무리 리그 최강의 KIA 타선이라도 오늘 엔스처럼 던지는 투수를 만나면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엔스는 그야말로 '슈퍼 에이스'가 뭔지 잘 보여주더라고요. 네일이나 알드레드처럼 스태미너가 떨어지지도 않고 경기 후반까지 구위를 유지하는 모습에서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8회까지 KIA 타자들이 아무 것도 못한 건 정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 150km/h을 상회하는 포심이 한가운데가 아니라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 ABS를 농락하며 들어갔고, 1회에는 커브를 활용하면서 KIA 타자들의 히팅 포인트를 뒤로 늦추더니, 타순이 한 바퀴 도니까 그때부터 포심과 커터 조합으로 히팅 포인트가 뒤에 있던 KIA 타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었죠. 첫 타순보다 두 번째 타순에서 삼진을 더 많이 당했던 이유입니다.
제구라도 안 좋으면 모를까, 오늘 엔스는 컨트롤도 예술이더라고요. 투구 수 90개 이전까지는 전혀 공략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포심 제구만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커터와 커브까지 존 근처로 던지는 오늘 같은 투구만 계속 유지한다면, LG 선발진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다만, 이 선수의 약점은 꾸준함이 떨어진다는 점 같은데, 오늘 투구만 보면 왜 엔스가 오프 시즌 동안 가장 주목 받았던 외국인 투수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승리의 요인 - 박찬호와 최원준
엔스의 공은 도저히 공략이 어려워 보여서 지난 주 삼성전과 마찬가지로 불펜을 공략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였습니다. LG 불펜의 두께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도 사실이니까, 엔스를 7회 이전에만 내리면 승부가 될 거라고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엔스는 8회 원 아웃 까지 잡고 내려갔습니다. 이러면 LG 불펜을 공략하기 힘들어 집니다.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구위를 자랑하는 마무리 투수(9이닝 당 탈삼진이 10.62개)인 유영찬이 올라오니까요.
그런데 엔스의 무지막지한 공을 경험해서 그런지, 유영찬 공은 상대적으로 쉽게 공략했습니다. 여기에 오늘 유영찬의 포심이 평소보다 가운데 몰리는 공이 많았죠. 선두타자 박찬호가 친 코스부터 한가운데 높은 포심이었습니다. 이어서 소크라테스의 내야 안타성 타구를 신민재의 신들린 수비(농담아니라 리그에서 2루 수비 제일 잘 하는 듯)로 아웃 카운트가 올라갈 때 오늘 경기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이것을 극복한 게 최원준의 적시타였죠. 특히, 1구와 2구째 포크볼에 전혀 대응이 안 되었는데, 유영찬의 하이 패스트볼이 치기 좋은 위치로 들어간 게 실투였습니다. 포크볼 3개째가 부담스러웠다면 하이 패스트볼을 더 높게 던졌어야 했죠.
그리고 9회 박찬호의 안타의 경우, 박찬호의 주루 플레이가 선수들에게 에너지를 불어 넣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사실, 2점 차이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2루까지 무리해서 달릴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중견수가 정면에서 잡은 타구에도 박해민의 어깨가 약했던 점, 수비 쉬프트가 우측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을 모두 계산해서 2루까지 주저하지 않고 뛰어 들어간 박찬호의 판단이 정말 대단했죠. 이게 바로 BQ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2루까지 진출한 박찬호는 선수들에게 화이팅을 불어 넣어줬고요.
최원준의 안타로 기회가 이어진 9회 1사 1루 상황, 김도영의 장타를 기대했지만, 김도영은 유영찬의 몸쪽 바짝 붙은 포심을 억지로 컨택해서 평범한 유격수 땅볼에 그칩니다. 다만, 김도영의 주력이 아니었다면 병살로 경기가 끝났을 거에요. 김도영의 주력이 너무 뛰어나니 LG에서는 병살 시도 조차 하지 않았죠. 그리고 9회 2사 이후에 최형우가 유영찬의 3구째 가운데 몰린 실투를 놓치지 않고 중견수 앞으로 날렸고, 도루 스타트를 끊었던 김도영은 여유있게 1루에서 홈까지 들어오는 대단한 주력을 보여줬습니다.(홈 슬라이딩은 세레모니라고 칩시다.)
오늘 엔스는 97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실투를 5개도 안 던졌습니다. 하지만 유영찬은 21개의 공을 던지는 동안 실투 3개를 던졌죠.(박찬호, 최형우 상대로 몰리는 포심, 최원준 상대로 어중간한 높이의 하이 패스트볼) 강한 타선은 '실투를 놓치지 않는 데'에 있습닌다. 어제 최형우가 불리한 카운트에서 이상영의 한 가운데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만루홈런으로 연결했고, 오늘 박찬호, 최원준, 최형우가 모두 실투를 놓치지 않고 경기를 원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강한 타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실수를 놓치지 않는 거죠.
전상현이 9회말을 깔끔하게 막고, 저는 10회에는 정말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LG 불펜이 작년의 그 불펜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1사 이후에 서건창이 나쁜 볼을 모조리 골라내며 볼넷을 골라 나갔고(선구안은 진짜 커리어 최고 수준인 듯) 한준수의 운이 따르는 안타가 나오면서 1사 1, 3루의 찬스를 잡았죠. 타석에는 박찬호. 전 당연히 박찬호가 우익수 외야 플라이를 날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우익수 외야 플라이는 카운트가 불리할 때 박찬호가 아주 많이 만들어 내는 타구거든요. 실제로 본인도 오늘 경기 수훈 인터뷰 때 '우익수 외야 플라이는 누구보다 잘 만들 수 있다.' 고 자기 비하 섞인 농담으로 하기도 했죠.
박찬호는 왜 평가 절하를 당하는 가?
박찬호가 이런 타격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선구안'이 발전했고 '컨택' 툴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스탯티즈에 따르면 올해 박찬호의 스윙 대비 콘택트 비율은 99.3% 입니다. (이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이 수치가 나올 수가 있나;) 리그 유격수 중에 가장 뛰어난 수치고, 팀내에서도 김선빈(103.8%) 다음으로 높은 수치에요. 박찬호에게 없는 건 '파워'일 뿐, 선구안과 컨택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찬호의 선구안이 별로라는 오해가 있는데, 박찬호의 존 밖 스윙율은 26.7%를 기록하며, 최원준(25.8%) 다음으로 낮습니다. 박찬호 출루율이 낮은 이유는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적극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죠. '파워'가 없으니까요.
박찬호는 공격력이 부족한 '유격수'가 아닙니다. 파워를 빼면 타격 기술은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단, KIA 역대 유격수 중에 수비 범위가 가장 넓고 어깨도 강하죠. 실책이 많다? 적극적인 수비의 결과일 뿐입니다. 오늘만 해도 보세요. 홍창기의 내야 안타를 잡는 과정에서 베이스에 공이 맞고 튀었는데 그걸 정확히 포구하고 1루까지 송구하는 모습을요. 이런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유격수는 리그에 몇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때는 송구를 안 하는 게 맞는데, 박찬호는 실책이 나오는 걸 감수하고도 송구를 하죠. 이게 적잖은 실책의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실, 그렇게 실책이 많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박찬호를 보며 일부에서는 폐급 유격수로 낙인을 찍어 버리고, 주력에 에이징 커브가 왔다는 헛소리까지 해대는데, '발은 슬럼프'가 없죠. 그냥 운이 안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찬호는 지금 우수한 컨택과 수비로 9번 타자로 세우면 차고도 넘치는 타자에요. 적어도 '구멍'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왜 박찬호에 대한 평가는 항상 박한 지 모르겠습니다. 박찬호가 내야에서 빠지면 수비 조직력 전체가 흔들립니다. 박찬호에 대한 억까는 제발 그만 좀 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는 없겠죠. 그냥 박찬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너를 싫어하는 사람보다는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드디어 기대치를 충족하고 있는(?) 최원준
오늘 경기 박찬호도 정말 잘 해줬지만, 실제로 팀 타선에서 가장 맹활약한 건 최원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유일하게 엔스를 상대로 9구 승부 끝에 안타를 치고 나가면서 범상치 않는 모습을 보여줬고, 9회에 유영찬의 하이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고 적시타를 때려냈으며, 10회에는 승부에 마침표를 찍는 1-2루간의 적시타까지 날렸죠. 코스 운이 좀 따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타이밍이 잘 맞았던 빠른 땅볼 타구였어요. 그리고 그 대단한 수비 범위의 신민재가 잡지 못하는 공이었으니, 타구 스피드는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최원준이 좋은 건 부진할 때 보였던 힘 없는 좌익수 플라이(어제 오늘 박해민이 자주 치던 거)가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아웃이 되더라도 타구가 우측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죠. 보통 야구 커뮤니티에서 흔하게 나오는 말이 '밀어쳐'라는 주문인데, 좋은 타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당겨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타구 속도가 붙으니까요.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고 치고 싶으면 이용규처럼 주력이 좋거나 좌타자면 이해합니다. 김선빈도 과거에 발 빠를 때는 잘 밀어 쳤지만, 발이 느려진 요즘에는 당겨 치기도 잘 합니다. 그리고 김선빈 2017년 3할 후반대의 타율 기록할 때는 생각보다 당겨 친 타구도 많았죠.
최원준도 히팅 포인트를 지나치게 뒤에 둘 필요 없이,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우측으로 강한 타구를 날리는 방향으로 스윙을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오늘 9회 적시타가 밀어 친 거 아니냐고요? 유영찬이 포크볼 2개 연속으로 던진 상황에서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지 못 하는 상황, 리그에서 가장 위력적인 포심이 들어오는데 당겨 치는 건 예측 스윙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하이 패스트볼을 정확히 받아 쳐서 페어 지역으로 보낸 최원준의 스윙과 컨택 능력을 칭찬해야 하죠.
시즌 초 구박 받던 최원준과 박찬호가 이번 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하니까 팀 타선도 짜임새가 좋습니다. 이범호 감독의 구상이 이런 거에요. 박찬호 - 최원준 - 김도영이 빠른 발로 상대 투수진을 흔들고, 최형우 - 나성범 - 소크라테스 - 이우성이 장타로 결정타를 날리는 그런 모습. 김도영이 예상 외로 빠른 발과 장타 모두 갖추면서 KIA 타선이 좋은 득점력을 갖추긴 했지만, 이범호 감독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후반기 시작해서 지금 타선을 보면 이범호 감독의 구상대로 타선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서 이범호 감독이 '8월에 치고 올라갈 것이다' 라고 메시지를 던진건가 싶어요. 박찬호와 최원준에게 인내심있게 기회를 주면서 여기까지 올려줬으니까요. 만약 이대로 박찬호와 최원준이 지금의 활약을 시즌 끝까지 이어 간다면 이범호 감독에게 '초보 감독'이라는 딱지는 악의적인 프레임으로 봐도 될 정도입니다. 팀 타선의 완전체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즌을 운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아직 시즌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제 이야기한 선발진에 이닝 이터가 없는 건 여전히 KIA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야수진은 더 깔 게 없을 정도로 선수 구성도 좋고, 감독도 운영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믿음을 줘서 볼넷 골라 나가는 테이블세터형 선수로 변모시킨 것도 이범호 감독의 공이고, 최원준을 다시 리바운드하게 만든 것도 이범호 감독의 공입니다. 이건 다 이범호 감독이 KIA 타이거즈에 오래 있었기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해요. 올해 이범호 감독이 많은 걸 얻어내는 시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수 단평
[7/12] KIA : SSG - 경기를 망친 김선빈과 김사윤 (1) | 2024.07.12 |
---|---|
[7/11] KIA : LG - 좌타 저승사자 캠 알드레드 (1) | 2024.07.11 |
[7/9] KIA : LG - 한 수 위의 날카로움 (0) | 2024.07.09 |
[7/4] KIA : 삼성 - 자체 육성 뎁쓰의 힘 (2) | 2024.07.04 |
[7/3] KIA : 삼성 - 단단한 불펜, 튼튼한 중심타선 (0) | 202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