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요인
오늘 KIA는 두산과의 3연전 치열한 혈전을 벌이는 바람에 성영탁, 전상현, 정해영을 등판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범호 감독이 다른 건 몰라도 투수들의 3연투는 철저히 막고 있는데, 잘 하는 거죠.) 아무튼, 경기 초반 리드를 잡더라도 투수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김대유가 안타를 맞은 이후 무사 1루에서 올라 온 김시훈이 무려 2.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줬고, 마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1점 차이의 터프 세이브 상황에서 한재승이 한화의 중심타선을 상대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경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8회초에는 박찬호의 결정적인 수비도 있었죠. 1사 이후에 김태연이 김시훈의 가운데 형성되는 변화구를 놓치지 않고 안타를 만들었고, 최지민이 마운드에 올라와서 폭투를 던지면서 2사 3루가 된 상황이었는데 문현빈의 빗맞은 유격수 땅볼을 전광석화처럼 잡은 이후에 송구까지 완벽하게 해주면서 1cm 차이로 1루에서 문현빈을 잡아 낸 수비가 매우 결정적이었습니다. 자칫 동점 내야안타가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8회 박찬호의 수비도 오늘 경기를 잡은 중요한 포인트였죠.
트레이드로 만들어 낸 1승
오늘 승리는 그야말로 트레이드의 효능감을 제대로 느낀 경기였죠. 트레이드로 영입한 두 선수가 1점 차 리드를 3.1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막아줬으니까요.(불안하긴 했지만, 최지민도 두 명의 좌타자를 잘 잡아냈습니다.)
먼저, 승리의 가장 일등공신은 2.1이닝을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은 김시훈입니다. 김시훈의 장점은 역시 '구종 다양성'에 있는 것 같아요. 김시훈이 던지는 구종은 포심, 커브, 슬라이더, 포크까지 4개나 됩니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107.1이닝(39경기 18선발)을 던진 작년에는 포심 41.2%, 커브 18.4%, 슬라이더 14.6%, 포크 25.7%를 던졌습니다.
투수가 커브와 슬라이더 둘 다 잘 던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하죠. 그런데 김시훈은 커브와 슬라이더를 꽤 높은 비율로 구사할 줄 알고, 모두 존 근처에서 넣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던지는 포크볼도 잘 던지는 선수이고요. 종으로 떨어지는 구종이 많다는 것은 확실한 장점입니다.
다만, 이렇게 종으로 떨어지는 구종이 많은 선수는 포심의 구위가 뒷받침되어야 변화구도 더욱 위력적으로 작용하는데요. 지난해 구종별 피OPS를 보면 커브의 피OPS가 .833으로 변화구 중에서는 가장 높았습니다. 당연히 가장 피OPS가 높은 구종은 포심(.887)이었고요. 그냥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오늘 잘 던진 건 구종의 다양성 덕분도 봤지만, 커맨드가 좋았습니다. 최지민과 달리 크게 벗어나는 공 없이 대부분의 구종을 존 근처로 던졌습니다. ABS에 살짝 걸치는 슬라이더도 있었고, 커맨드가 잘 이루어진 경기라고 할 수 있어요.
단점은 역시 구속이네요. 오늘 그래도 144km/h까지 던졌다고는 하지만, 포심의 평균구속이 141.7km/h에 그쳤습니다. 그래서 2.1이닝이나 던지고도 삼진을 단 1개도 잡아 내지 못했어요. 심지어 26개의 투구 중에 타자가 헛스윙 한 공이 딱 1개(초구 노시환의 140km/h 한가운데 포심) 밖에 없었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오늘 좋은 투구에는 '운이 따랐다'고 볼 소지가 큽니다.
오늘처럼 운이 좋은 날에는 컨택이 되는 타구들이 수비 정면으로 가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첫 타자 노시환의 병살타 타구는 비교적 강한 타구였죠. 그래서 김시훈의 과제는 구속 회복에 달려 있습니다. 작년에 구속이 안 나온 건 선발과 불펜을 오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올해 불펜으로 전업했는데도 구속이 나아지지 않았죠.
올해 김시훈의 구속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이, NC 불펜이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WAR을 2.31 찍은 김시훈을 보낸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NC에서는 김시훈의 구속 회복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거죠. 실제로 KIA에서도 NC에서 요구한 메인 카드는 김시훈이 아니라 한재승이었고요.
그래도 오늘 144km/h까지 던질 걸 보면, 희망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상이 없음에도 구속이 안 나오는 건,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지난해 선발로 제법 많은 경기에 나선 것과 다양한 변화구를 던진 데에서 오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올 시즌 끝나면 미국 피칭 아카데미 같은 데에 가서 진단을 한 번 받아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래도 150km/h을 던졌던 투수이니까요.
김시훈도 선발 욕심 버리고, 불펜으로 전업한다고 생각하면 구종을 단순화해서 포심의 구위를 살릴 수 있는 피칭 디자인을 짤 필요가 있습니다.
한재승, 정해영의 공백을 미리 볼 수 있었던 투구
9회에는 누가 올라올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전, 최지민으로 끝까지 갈 거라고 봤어요. 하지만 8회에 잘 막긴 했어도 포심 컨트롤이 정말 엉망이었죠. 잘 들어가는 공도 많았지만, 타자 머리 쪽으로 크게 벗어나는 공도 2~3개 정도 나오는 걸 보면, 최지민은 구위 대비 커맨드 면에서 신뢰를 주기엔 부족한 건 맞습니다. 그래도 구위가 좋으니 9회에는 밀고 갈 거라고 봤어요.
그런데 한재승을 올리더군요. 전, 걱정이 컸습니다. 제구력이 좋지 못한 선수이고 심지어 마무리로 뛴 경험도 거의 없죠. 아니, 세이브 상황 등판은 처음이라고 방송사에서 언급한 걸 보면 9회 마무리 경험도 처음이었을 겁니다.
9회에는 귀신이 산다고 합니다. 그만큼 강심장인 투수가 아니면 경기를 끝내기 쉽지 않아요. 그런데 경험이 없는 선수가, 그것도 1점 차이의 터프 세이브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온다고? 이건 정말 도박수에 가까웠죠.
그런데 우려와 달리 한재승은 '볼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래는 오늘 한재승이 던진 공들의 위치입니다.
첫 타자 노시환에게 던진 볼 중 한재승이 의도치 않은 공은 1개도 없었습니다. 초구부터 하이패스트볼을 박더니, 2구째는 존에서 떨어지는 슬라이더. 그리고 3구째 하이 패스트볼 존 경계에 들어 왔는데 노시환의 방망이가 늦자, 그 코스로 조금 더 강한 포심을 던져서 헛스윙으로 돌려 세웁니다. 구속은 147km/h에 불과(?)했는데, 노시환의 방망이는 한참 늦게 돌았습니다. 그리고 구속 이상의 수직 무브먼트가 카메라로 느껴졌고요.
채은성 상대로도 의도치 않은 볼은 초구 포심 뿐이었습니다. 2구째와 3구째 몸쪽 포심을 정확하게 제구해냈고, 4구째에 한준수가 떨어지는 길을 손짓하면서 이쪽으로 던지라고 하니까 정말 그 쪽으로 던졌습니다. 다만, 채은성은 유인구를 골라 냈고, 5구째 포심 역시 하이 존 경계에 던지면서 방망이를 빗맞추고 평범한 유격수 땅볼을 유도했습니다.
비록 안타는 맞았지만, 안치홍 상대로도 의도하지 않은 공은 거의 없었어요. 초구 하이 패스트볼도 포수가 요구한 코스였죠. 가장 좋았던 공은 3구째 슬라이더 였는데, 2구째 포심이 몸쪽으로 들어온 것에 당황한 안치홍이 3구째 슬라이더를 예상하지 못 하고 어정쩡한 헛스윙을 합니다. 포심의 구위가 좋기 때문에 이런 장면이 연출이 되죠.
그리고 5구와 6구를 안치홍은 끈질기게 커트를 했는데 보통, 이렇게 타자가 커트하다보면, 경험이 적은 투수는 볼질을 하기 마련이지만, 한재승은 꿋꿋하게 하이 존 경계에 포심을 우겨 넣었습니다. 안치홍의 방망이가 짧고 빠르게 돌면서 좌익수 앞 안타가 되긴 했지만, 충분히 칭찬 받을 투구였어요. 게다가 노시환, 채은성, 안치홍 셋 다 1군 경험이 많은 타자들이니 더욱 칭찬해줄만 하죠.
경기는 비록, 한재승의 견제에 걸린 이상혁의 1루 아웃으로 끝났지만(이 장면도 운이 따랐죠. 역모션에 걸렸다지만, 슬라이딩 장갑이 그라운드에 미끄러지지 않으면서 1cm 늦음) 하주석을 상대로도 볼질 없이 2볼 2스트라이크라는 유리한 카운트를 선점을 이미 해 놓은 상태였어요. 마지막 4구째 볼만 높게 들어갔지, 나머지 공들은 의도대로 존에 넣었죠.
왜 KIA에서 한재승을 메인으로 요구했는지, 그리고 올해 오선우와 김호령의 활약으로 잉여 자원이 됐다지만, 부메랑을 맞을 각오를 하고, 지난해 주전 외야수 2명(최원준, 이우성)과 1순위 내야 백업을 보냈는 지 알 수 있었던 장면이었습니다.
트레이드 후기 글에 '이 트레이드는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한 트레이드'라고 평했었는데, 운이 따르면 현재를 위한 트레이드가 될 수도 있어 보입니다. 생각보다 김시훈의 커맨드는 안정되어 있고, 한재승의 구위는 위력적입니다. 이 두 투수들이 작년만큼만 해줘도(김시훈 WAR 2.31, 한재승 WAR 0.88) KIA는 큰 도움이 되죠. 가뜩이나 우완 투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조상우도 10일 잘 쉬다 와서 6월 활약을 재현해준다면, 정해영이 운 없는 투수가 아닌 운도 따르는 투수가 된다면 후반기 불펜이 흔들리는 빈도는 줄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물론, 오늘 1경기만 놓고 평가하기엔 매우 이르고, 김시훈과 한재승 모두 좋은 모습도 보여줬지만, 단점도 보여준 경기이긴 했으니까요.
선수 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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